8월 14, 2025
라피드빈 오스트리아빈

지나간 제국의 영광, 오스트리아와 비엔나 축구의 GOAT는?

유럽 축구의 심장부에는 수많은 더비 경기가 존재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를 양분하는 ‘비엔나 더비(Wiener Derby)’만큼 도시의 역사와 사회적 정체성을 깊숙이 투영하는 라이벌전은 드물다. 이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져 온 두 클럽, SK 라피트 빈과 FK 오스트리아 빈의 자존심 대결이자, 비엔나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두 개의 다른 영혼, 즉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부르주아 계급의 지성이 축구라는 이름으로 충돌하는 문화적 현상이다.

본 포스트는 2025년의 최신 정보를 바탕으로, 두 클럽의 탄생 배경과 역사, 고유한 클럽 문화와 철학, 그리고 각 팀을 상징하는 불멸의 레전드 10인을 심층적으로 비교 분석함으로써 비엔나 더비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1. SK 라피트 빈: 노동자 계급의 자부심, 휘텔도르프의 투혼

역사: 노동자의 클럽에서 오스트리아의 기록 챔피언으로

SK 라피트 빈의 역사는 1899년, ‘제1 비엔나 노동자 축구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클럽의 이름 자체가 증명하듯, 라피트는 비엔나의 노동자 계급에 깊이 뿌리를 둔 클럽입니다. 라피트는 1911-12 시즌 오스트리아 최초의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으며, 현재까지 총 32회의 리그 우승으로 오스트리아 최다 우승 클럽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클럽 문화와 철학: ‘라피트 정신’과 ‘라피트피어텔슈툰데’

라피트 빈을 이야기할 때 ‘라피트 정신(Rapid Spirit)’과 이를 상징하는 ‘라피트피어텔슈툰데(Rapidviertelstunde)’ 문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라피트의 15분’이라는 뜻의 이 전통은 경기 종료 15분을 남기고 스코어와 상관없이 모든 팬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며 팀을 응원하는 독특한 문화입니다. 이는 100년 이상 이어져 온 라피트의 가장 상징적인 전통으로, 클럽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체성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라피트 빈의 위대한 거인들

  1. 프란츠 “빔보” 빈더 : 라피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잡이. 1941년 독일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0-3으로 뒤지던 경기를 10분 만에 해트트릭으로 뒤집은 일화는 전설입니다.
  2. 에른스트 하펠 :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세계적인 족적을 남긴 전설. 1940-50년대 라피트의 수비를 이끌며 6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3. 게르하르트 하나피 :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 은퇴 후 건축가로 활동하며 라피트의 홈구장을 직접 설계했습니다.
  4. 한스 크랑클 : 1978년 유러피언 골든 부츠를 수상한 라피트의 상징적인 스트라이커. 1980년대 클럽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5. 요제프 “페피” 비찬 :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선수 중 한 명. 1930년대 라피트에서 49번의 리그 경기에서 52골을 터뜨렸습니다.
  6. 슈테펜 호프만 : ‘축구의 신’이라 불린 21세기 라피트의 상징. 두 차례 리그 우승의 주역이었으며, 주장으로서 팀의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7. 페타르 “페초” 브루치치 : 1980년대 라피트의 성공적인 시대를 이끈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미드필더.
  8. 로베르트 디엔스트 : 1948년부터 1962년까지 활약한 전설적인 골잡이. 리그 경기당 1골이 넘는 놀라운 득점력을 자랑했습니다.
  9. 루디 플뢰겔 : 14년간 라피트에서만 뛴 원클럽맨. 클럽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꾸준함의 상징.
  10. 에디 바우어 : 클럽 초창기의 전설. 라피트가 오스트리아 축구의 초창기 지배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격수.

2. FK 오스트리아 빈: 비엔나 카페 문화의 상징, ‘디 필혠’

창단과 역사: 부르주아의 지성과 예술적 축구

FK 오스트리아 빈은 1911년, ‘비엔나 아마추어 스포츠 협회’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습니다. 라피트 빈과 달리, 처음부터 비엔나의 중산층, 즉 부르주아와 지식인 계층의 클럽이었습니다. 1930년대에는 ‘분더팀’이라 불리던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근간이 되어 기술적이고 창의적인 축구로 유럽에 명성을 떨쳤습니다.

클럽 문화와 철학: ‘바이올렛’과 우아한 ‘샤이벌슈필’

오스트리아 빈은 비엔나의 독특한 ‘카페하우스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오스트리아 빈의 팬과 관계자들은 축구를 하나의 예술 형태로 여기며, 힘과 투쟁보다는 기술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샤이벌슈필’이라 불리는, 짧고 빠른 패스를 통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기술적인 축구 스타일의 탄생 배경입니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투혼’을 상징하는 라피트의 ‘라피트 정신’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불멸의 영웅들

  1. 마티아스 진델라 : ‘종이 인간’. 1930년대 오스트리아 ‘분더팀’의 심장이자 상징. 천재적인 드리블과 창의성으로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 축구를 구현했습니다.
  2. 헤르베르트 프로하스카 : ‘작은 곱슬머리’. 20세기 오스트리아 최고의 선수.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클럽의 황금기를 이끈 플레이메이커.
  3.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 ‘시계 장치’. 1950년대 세계 최고의 센터 하프로 평가받았던 정확하고 꾸준했던 미드필더.
  4. 토니 폴스터 : ‘토니 도펠파크’. 오스트리아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 1986-87 시즌 유러피언 골든슈 수상.
  5. 발터 나우슈 : 1930년대 ‘분더팀’의 주장. 나치의 협박을 거부하고 망명했으며, 훗날 감독으로서 오스트리아를 1954년 월드컵 3위로 이끌었습니다.
  6. 에리히 오버마이어 : 클럽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보유한 전설적인 수비수. 18시즌 동안 오직 오스트리아 빈에서만 활약한 원클럽맨.
  7. 펠릭스 가셀리히 : 1980년대 황금기를 이끈 핵심 미드필더. 프로하스카와 함께 강력한 중원을 구축했습니다.
  8. 로베르트 자라오버마이어 : 이전의 최다 출장 기록 보유자이자 전설적인 수비수 겸 주장.
  9. 에른스트 바우마이스터 : 1980년대 황금기 중원의 마지막 퍼즐. 시대를 풍미한 미드필더.
  10. 에른스트 슈토야스팔 : 클럽 역사상 최다 득점자(220골). 2차 세계대전 이후 클럽의 재건을 이끈 공격수.

결론: 비엔나를 지배하는 것은 누구인가?

영광의 기록: 트로피 캐비닛 비교

대회SK 라피트 빈FK 오스트리아 빈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32회24회
ÖFB-컵 (오스트리아 컵)14회27회
오스트리아 슈퍼컵3회6회
미트로파 컵2회2회
독일 챔피언십1회0회

리그에서는 라피트 빈이, 컵 대회에서는 오스트리아 빈이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는 두 클럽의 라이벌리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우위가 아닌, 서로 다른 영역에서 각자의 자부심을 쌓아온 치열한 경쟁의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라피트 빈: 투쟁의 서사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끈기를 상징하는 라피트 빈의 ‘라피트 정신’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15분’은 거친 함성 속에서 피어나는 투혼입니다.

오스트리아 빈: 예술의 서사

부르주아 계급의 지성과 예술성을 대변하는 오스트리아 빈의 ‘샤이벌슈필’은 지적인 토론이 오가던 카페하우스의 낭만을 그라운드에 옮겨 놓은 것과 같습니다.

결국 비엔나를 지배하는 것은 어느 한 클럽이 아니라, 이 두 클럽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긴장감, 즉 ‘비엔나 더비’ 그 자체입니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자,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는 두 클럽은 함께 비엔나 축구의 완전한 영혼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라이벌리가 계속되는 한, 비엔나의 심장은 언제나 뜨겁게 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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