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 2025
하펠 히츠펠트

독일어권 GOAT 감독은?

축구의 역사는 수많은 명장들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경기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리누스 미헬스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에른스트 하펠과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단순한 명장을 넘어, 현대 축구라는 거대한 건축물의 설계도를 그린 두 명의 위대한 건축가로 평가받습니다.

하펠은 여러 국가와 클럽을 넘나들며 실용주의적이면서도 혁명적인 전술로 유럽을 정복한 ‘방랑하는 혁명가’였습니다. 반면 히츠펠트는 ‘장군(Der General)’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독일의 거함을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승리 기계로 만들어낸 ‘치밀한 설계자’였습니다. 2025년의 시점에서, 두 감독의 선수 시절부터 지도자로서의 여정, 전술적 청사진, 그리고 그들이 현대 축구에 남긴 깊고도 뚜렷한 족적을 심층적으로 비교 분석하며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거인의 탄생: 선수에서 감독으로

에른스트 하펠: 비엔나의 수비수, 전술적 선구자가 되다

에른스트 하펠의 축구 철학은 그가 직접 경험한 최고 수준의 경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라피드 빈과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핵심 수비수로서 화려한 선수 경력을 보냈으며, 1954년과 1958년 월드컵에 참가했습니다. 수비수로서 필드 위에서 공간과 수비 조직의 역학을 몸소 체득한 경험은 훗날 그가 감독으로서 전술적 혁신을 이루는 데 직관적인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오트마어 히츠펠트: 수학 교사에서 ‘장군’으로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배경은 하펠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는 준수한 스트라이커였지만 국제적인 스타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수학 교사 자격증을 가진 학구파라는 점이 더 주목받았습니다.

그의 지도자 경력은 스위스 리그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선수 시절의 경험보다는, 마치 수학 문제를 풀 듯 팀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고 최적의 해법을 찾아내는 그의 능력은 그를 ‘장군(Der General)’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했습니다.


2. 유럽 정복기: 트로피와 승리의 연대기

에른스트 하펠: 범유럽적 정복자

그의 위대함은 특정 리그나 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이식해 성공을 거두는 놀라운 적응력에 있습니다.

  • 페예노르트 (1970년): 네덜란드 클럽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차지하며 네덜란드 축구를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끌어올렸습니다.
  • 함부르크 (1983년): 미셸 플라티니가 버티던 당대 최강 유벤투스를 상대로 플라티니를 완벽하게 봉쇄하는 맞춤 전술로 두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 그는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4개국에서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네덜란드 대표팀을 1978년 월드컵 결승으로 이끄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적응력을 과시했습니다.

오트마어 히츠펠트: 독일 축구의 지배자

그의 커리어는 ‘지배’라는 단어로 요약됩니다. 그는 독일의 두 거대 클럽을 이끌고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며 왕조를 구축했습니다.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7년): 당시 유럽 최강 유벤투스를 꺾고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랐습니다. 지네딘 지단을 완벽히 무력화시킨 그의 전술은 실용주의의 극치였습니다.
  • 바이에른 뮌헨 (2001년): 1999년 결승전의 비극적인 패배를 딛고 일어나 두 번째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 그는 7번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포함, 엘리트 클럽을 장기적으로 운영하고 왕조를 건설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거장의 우승 기록 비교

트로피에른스트 하펠오트마어 히츠펠트
유러피언컵/챔피언스리그2회2회
국내 리그 우승8회 (4개국)9회 (2개국)
국내 컵 우승6회6회
인터컨티넨탈컵1회1회
국가대표팀 주요 성적FIFA 월드컵 준우승 (1978)

3. 피치 위의 청사진: 전술적 해부

수비의 기초: 능동적 방어 vs. 실용적 방어

  • 하펠의 시스템: 수비를 경기를 지배하기 위한 능동적인 무기로 활용했습니다. 높은 수비 라인과 의도적인 오프사이드 트랩, 그리고 윙어를 첫 수비수로 활용하는 집단 압박 개념은 훗날 미헬스와 사키가 발전시킨 압박 시스템의 원형으로 평가받습니다.
  • 히츠펠트의 시스템: 언제나 견고하고 조직적인 수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97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폴 램버트를 이용해 상대 에이스 지네딘 지단을 완벽히 무력화시킨 전술은 그의 실용주의를 상징합니다.

포메이션과 유연성: 혁명 vs. 적응

  • 하펠의 4-3-3 혁명: 당시 주류였던 4-2-4에 맞서 미드필드에서 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4-3-3 포메이션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훗날 ‘토털 풋볼’의 상징이 되었지만, 그 시작은 하펠의 선구적인 통찰력이었습니다.
  • 히츠펠트의 맞춤형 시스템: 특정 철학을 고집하기보다 선수단의 특성에 맞춰 최적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능했습니다. 도르트문트에서는 3-5-2를, 바이에른에서는 4-4-2, 3-4-3, 5-4-1 등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포메이션을 구사했습니다.

4. 리더십의 기술과 영원한 유산

리더십의 기술: 대조되는 카리스마

히츠펠트 ‘장군’: 침착한 심리학자

그는 ‘FC 할리우드’라 불릴 정도로 개성 강한 바이에른 뮌헨의 라커룸을 능숙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지시를 내리는 감독이 아니라, 선수 개개인의 심리를 파악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심리학자에 가까웠습니다.

하펠 ‘월드맨’: 과묵한 동기부여가

그는 말이 거의 없었고, 종종 무뚝뚝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1978년 월드컵 결승전을 앞두고 그가 선수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신사 여러분, 승점 2점”이라는 단 세 마디였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는 존경과 약간의 두려움을 통해 팀을 장악했습니다.

2025년에 돌아본 영원한 유산

  • 에른스트 하펠: 현대 축구의 숨겨진 개척자그의 집단 압박과 높은 수비 라인, 오프사이드 트랩은 미헬스의 ‘토털 풋볼’과 사키의 ‘압박 축구’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계보를 형성합니다. 클롭의 ‘게겐프레싱’이나 과르디올라의 ‘포지셔널 플레이’ 역시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펠의 선구적인 아이디어와 맞닿아 있습니다.
  • 오트마어 히츠펠트: 거함(巨艦)을 만드는 기술의 완성자그의 유산은 엘리트 클럽을 이끌고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는 ‘경영 기술’의 완성에 있습니다. 그는 슈퍼스타들의 자존심을 관리하고, 구단의 복잡한 내부 정치를 조율하며, 팬과 미디어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완벽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두 불멸의 거장에 대한 최종 평결

하펠은 여러 리그를 떠돌며 혁신을 이식한 ‘개척자’였고, 히츠펠트는 특정 리그의 거함을 완벽한 제국으로 만든 ‘건축가’였습니다. 하펠이 능동적인 전술로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가’였다면, 히츠펠트는 상대와 상황에 맞춰 최적의 해법을 찾아내는 ‘실용주의의 대가’였습니다.

누가 더 위대한 감독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간단한 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대함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두 개의 다른, 그러나 동등하게 찬란한 원형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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