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 2025
아약스 뮌헨

70년대 유럽 축구 황금기 GOAT 팀은?

1970년대 유럽 축구는 두 개의 위대한 왕조에 의해 정의됩니다.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년 연속 유러피언컵을 제패한 AFC 아약스와, 그들의 바통을 이어받아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똑같이 3연속 유럽 정상에 오른 FC 바이에른 뮌헨. 아약스는 ‘토털 풋볼’이라는 혁명적인 철학의 설계자였고, 바이에른 뮌헨은 독일 특유의 효율성으로 무장한 강력한 정복자였습니다.

이 두 팀의 연속적인 3연패는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1973년 유러피언컵 8강에서 아약스가 바이에른을 완파했고, 1974년 월드컵 결승에서는 각 팀의 핵심 선수들이 주축이 된 네덜란드와 서독이 맞붙어 서독이 승리하며 패권이 넘어가는 상징적인 순간을 만들었습니다. 이 글은 두 왕조의 철학, 전술, 핵심 선수, 그리고 그들이 현대 축구에 남긴 불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이 위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왕조의 철학: 어떻게 축구를 지배했는가

1971-73 아약스: 혁명의 구현

리누스 미헬스와 슈테판 코바치: 설계자와 완성자

아약스의 ‘토털 풋볼’은 두 명의 위대한 지휘자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제너럴’ 리누스 미헬스는 4-3-3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높은 압박과 유기적인 포지션 변경을 팀에 이식하며 혁명의 설계도를 그렸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슈테판 코바치는 선수들에게 예술적 자유를 불어넣어 그 시스템을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 완성자였습니다.

토털 풋볼: 유기적 시스템의 정수

아약스의 ‘토털 풋볼’은 단순히 선수들이 위치를 바꾸는 전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공간을 지배하는 철학이었습니다. 공격 시에는 경기장을 최대한 넓게 사용하고, 수비 시에는 경기장을 극도로 좁혀 상대를 질식시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는 11명의 천재가 만들어낸 시스템 축구의 정수였습니다.

1974-76 바이에른 뮌헨: 실용주의의 정점

우도 라텍과 데트마어 크라머: 승리의 설계자들

바이에른 뮌헨의 왕조는 ‘축구 교수’라 불린 두 명의 감독에 의해 구축되었습니다. 우도 라텍은 베켄바워, 뮐러, 마이어라는 전설적인 코어를 중심으로 팀의 뼈대를 세웠고, 데트마어 크라머는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처럼 세밀하고 강도 높은 훈련으로 팀에 승리 DNA를 각인시켰습니다.

리베로 시스템: 힘과 균형의 축구

바이에른의 시스템은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현대적인 ‘리베로’ 역할을 재창조한 인물로, 수비 라인 뒤에서 최종 수비수 역할과 팀 공격을 시작하는 후방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습니다. 아약스가 유기적인 집단주의를 통해 경기를 지배했다면, 바이에른의 힘은 명확하게 정의된 역할 속에서 세계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개인들의 완벽한 시너지에서 나왔습니다.


2. 그라운드 위의 체스: 전술 심층 분석

아약스의 공격과 수비: 공간, 압박, 그리고 유동성

아약스의 전술은 ‘통제’라는 한 단어로 요약됩니다. 요한 크루이프의 ‘가짜 9번’ 움직임을 중심으로, 선수들의 끊임없는 위치 변화를 통해 상대 수비수들이 맨마킹 대상을 특정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수비 시에는 공을 잃는 즉시 팀 전체가 집단적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높은 수비 라인과 정교한 오프사이드 트랩을 통해 상대의 공간을 질식시켰습니다.

바이에른 뮌헨의 시스템: 균형, 힘, 그리고 결정력

바이에른의 전술은 ‘결정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공격 패턴은 주로 측면을 활용하여 최전방의 ‘폭격기’ 게르트 뮐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공격의 마침표는 뮐러가 찍었고, 바이에른의 시스템은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이 골잡이에게 공을 배달하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수비에서는 ‘카이저의 청소부’ 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가 상대 에이스를 지우고, ‘안칭의 고양이’ 제프 마이어가 최후방을 지켰습니다.


3. 시대의 아이콘: 핵심 선수 비교 분석

필드의 지휘자: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

  • 요한 크루이프 (제너럴): ‘토털 풋볼’의 살아있는 화신. 경기장 전체를 누비는 ‘토털 플레이어’이자 팀의 주 득점원,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그리고 그라운드 위의 전술 지휘관.
  • 프란츠 베켄바워 (카이저): 현대적인 ‘리베로’ 포지션을 창조하고 완성시킨 인물. 최후방에서 평온함과 권위, 전략적인 통찰력으로 게임을 지배.

공격의 창: 요한 네스켄스 & 피트 카이저 vs. 게르트 뮐러

  • 아약스 공격진: 크루이프 외에도, 강철 같은 심장 ‘두 번째 요한’ 네스켄스와 예측 불가능한 천재 윙어 피트 카이저 등 여러 선수들의 협업으로 공격이 이루어졌습니다.
  • 게르트 뮐러 (폭격기): 축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골게터.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동물적인 위치 선정과 경이로운 민첩성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골을 만들어냈습니다.

4. 숫자로 증명된 영광: 주요 성과 비교

AFC 아약스 시즌별 성과 (1970-71 ~ 1972-73)

항목1970-711971-721972-73총계
감독리누스 미헬스슈테판 코바치슈테판 코바치
에레디비시2위1위1위2회 우승
KNVB컵우승우승준우승2회 우승
유러피언컵우승우승우승3회 우승

FC 바이에른 뮌헨 시즌별 성과 (1973-74 ~ 1975-76)

항목1973-741974-751975-76총계
감독우도 라텍우도 라텍/데트마어 크라머데트마어 크라머
분데스리가1위10위3위1회 우승
DFB-포칼준결승3라운드준결승
유러피언컵우승우승우승3회 우승

결론: 불멸의 유산, 현대 축구에 남긴 발자취

아약스의 철학적 유산: 크루이피즘과 포지셔널 플레이

아약스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트로피가 아닌, 그들이 남긴 전술적 청사진입니다. ‘토털 풋볼’은 요한 크루이프를 통해 ‘크루이피즘’으로 계승되었고, 그 영향력의 직계 후손이 바로 펩 과르디올라입니다. 과르디올라의 ‘포지셔널 플레이’ 속에는 미헬스와 크루이프의 DNA가 흐르고 있습니다. 아약스는 축구를 생각하고 플레이하는 방식 자체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이에른 뮌헨의 실용적 유산: ‘FC 할리우드’와 위닝 멘탈리티

바이에른 뮌헨의 유산은 특정 전술 시스템이 아닌, 클럽의 DNA에 각인된 ‘승리 문화’입니다. 1970년대의 3연패는 바이에른을 유럽 최고의 명문 반열에 올려놓았고, 이후 수십 년간 최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들의 유산은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를 아는 실용적인 지혜이며, 이는 그들을 반세기 동안 유럽 축구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게 한 힘입니다.

혁신과 영향력의 관점에서는 아약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실용적인 지배력과 승리하는 정체성 확립이라는 측면에서는 바이에른이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두 팀 모두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클럽 팀 중 하나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